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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저자
알랭 드 보통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뿐이라고,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느 순간이기도 할 것 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 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 다른 사람 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 …생략…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 신에게 있는 것- 비접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몇 시간 전만 해 도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클로이가 이미 나의 갈망의 대상이 라는 지위에 올랐다는 의미였다. 나는 밖에서 그녀가 보이 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 11시 30분에 내 인생에 들어왔을 뿐인 누군가 때문에 죽을 것 같은 느낌.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묘한 상실감, 슬픔 을 느꼈다.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겨우 아침을 함께 보낸 주제에 사랑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낭만적 미망과 의미론적 우둔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생략…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 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냐 단순한 망상이냐?
클로이를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만나고 나서 며칠 동안 그녀의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전화기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 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는 사람[우리는 곧 배은망덕해진다]이나 절대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우리는 곧 그 사람을 잊어벌니다]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 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녀의 자기 비하가 더욱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들의 위장된 호소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멍청해요/ 아니, 당신은 그렇지 않아요” 하는 식의 대화를 위도하는 거짓된 자기 비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클로이의 치마 밑으로 두 손을 미끄러뜨렸고 그녀는 늘 하던 일을 하듯 무심하게 내 바지 단추를 풀었다. 마치 우편함을 열거나 이불 홑청을 가는 사람처럼.
“나는 가서 아침을 준비할게. 그동안 샤워라도 해. 벽장에 깨끗한 수건이 있으니까. 참, 그런데 키스 한번 어때?”
“왜 그렇게 대책 없이 굴어? 아침 식사로 이만큼이나 준비했는데 고작 잼 하나 없다고 이런 난리를 피우다니. 정말 그 잼이 필요하다면 당장 여기서 나가서 다른 사람하고 같이 먹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해지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전에 어디선가, 어쩌면 전생에서, 또는 꿈에서 만났던 것 같기도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우리와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우리의 “반쪽”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한 느낌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태초에 모든 인간은 등과 옆구리가 둘에, 손과 다리가 넷, 하나의 머리에 두 얼굴이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자웅동체였다. 이 자웅동체들은 워낙 막강하고 자존심도 강해서 제우스는 이들을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모든 남자와 여자는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반쪽과의 결합을 원하게 되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한 분리의 흔적은 없지만 우리가 과거 어느 때인가 하나의 몸이었다가 갈라진 둘이라는 사실을 불인하는 것은 예의바르지 못한 짓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전화를 끊었고, 이어서 너는 함께 잔 여자에게 “시시한 건달 똘마니”처럼 행동하는 버릇이 있느냐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