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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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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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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뿐이라고,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느 순간이기도 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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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 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 다른 사람 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 …생략…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 신에게 있는 것- 비접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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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전만 해 도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클로이가 이미 나의 갈망의 대상이 라는 지위에 올랐다는 의미였다. 나는 밖에서 그녀가 보이 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 11시 30분에 내 인생에 들어왔을 뿐인 누군가 때문에 죽을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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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 들어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묘한 상실감, 슬픔 을 느꼈다.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겨우 아침을 함께 보낸 주제에 사랑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낭만적 미망과 의미론적 우둔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생략…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 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냐 단순한 망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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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를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만나고 나서 며칠 동안 그녀의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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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 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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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는 사람[우리는 곧 배은망덕해진다]이나 절대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우리는 곧 그 사람을 잊어벌니다]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 줄 줄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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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자기 비하가 더욱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들의 위장된 호소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멍청해요/ 아니, 당신은 그렇지 않아요” 하는 식의 대화를 위도하는 거짓된 자기 비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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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클로이의 치마 밑으로 두 손을 미끄러뜨렸고 그녀는 늘 하던 일을 하듯 무심하게 내 바지 단추를 풀었다. 마치 우편함을 열거나 이불 홑청을 가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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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서 아침을 준비할게. 그동안 샤워라도 해. 벽장에 깨끗한 수건이 있으니까. 참, 그런데 키스 한번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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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대책 없이 굴어? 아침 식사로 이만큼이나 준비했는데 고작 잼 하나 없다고 이런 난리를 피우다니. 정말 그 잼이 필요하다면 당장 여기서 나가서 다른 사람하고 같이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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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해지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전에 어디선가, 어쩌면 전생에서, 또는 꿈에서 만났던 것 같기도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우리와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우리의 “반쪽”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한 느낌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태초에 모든 인간은 등과 옆구리가 둘에, 손과 다리가 넷, 하나의 머리에 두 얼굴이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자웅동체였다. 이 자웅동체들은 워낙 막강하고 자존심도 강해서 제우스는 이들을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모든 남자와 여자는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반쪽과의 결합을 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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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한 분리의 흔적은 없지만 우리가 과거 어느 때인가 하나의 몸이었다가 갈라진 둘이라는 사실을 불인하는 것은 예의바르지 못한 짓으로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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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처음에는 전화를 끊었고, 이어서 너는 함께 잔 여자에게 “시시한 건달 똘마니”처럼 행동하는 버릇이 있느냐고 물었다.